흑과 다의 환상 by 유월


온다 리쿠의 삼월시리즈는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책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책 자체에 대한 말 입니다. 삼월 시리즈는 모르는 곳에서 모르는 사이에 자가증식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황혼녘 백합의 뼈’와 ‘삼월은 붉은 구릉을’, 그리고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거쳐서 ‘흑과 다의 환상’에 도달한 지금에도 이런 생각을 떨 칠 수가 없습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살펴보면...

네 명의 남녀가 태고의 숲이 있는 섬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리에코, 아키히코, 마키오, 세쓰코. 네 사람은 대학동창이자 친구들입니다.(그 중에서 리에코와 마키오는 애인이었다가 헤어진 전력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랜만에 친한 친구들끼리 뭉친, 즐거운 여행으로 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네 사람은 풀어내야만 하는 매듭을 하나씩 품고서 여행길에 오릅니다.

‘흑과 다의 환상’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각 장이 바뀔 때마다 화자가 바뀌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1부는 리에코의 이야기, 2부는 아키히코, 3부는 마키오, 4부는 세쓰코의 이야기죠.

읽기 시작했을 때는 장르가 미스테리 인 줄 알았습니다. 작품 초반에 가지와라 유리 - 리에코와 마키오가 헤어지는 원인이 된 여성 - 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설정되어 있는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지와라 유리는 살아있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죽었다면 어떤 식으로? 혹시 누군가가 그녀를 살해한 것은 아닐까....라는 수수께끼가 던져지다보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사실, 가지와라 유리는 중요한 인물이 맞습니다. 크든 적든 네 사람에게는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읽어가다 보면 유리라는 인물은 그저 계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미리 말하자면 모든 의혹은 마키오의 이야기에서 풀어집니다. 커다란 반전이라고 하기는 뭐 하지만 나름대로 받아들일 만 한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의혹이 밝혀진(?) 이후의, 리에코와 마키오의 모습입니다. 리에코의 경우, 절친한 친구였던 가지와라 유리에게 집착하지만, 실제로 풀어야만 하는 매듭은 옛 애인 마키오에 대한 감정인 것처럼 보입니다. 유리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고 있던 마키오가 풀어야만 하는 매듭은 의심에 대한 해명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고 다시 혼자가 되는 것으로 보이죠.(마키오에 대한 부분은 제멋대로의 해석이라 단정 짓기가 조금 힘들군요.)

그렇다면 아키히코와 세쓰코는? 친한 친구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두 사람이지만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나름대로’ 라고 하기에는 무게가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나 아키히코의 문제는 상당히 쇼킹하죠. 계기가 되는 것은 그저 비오는 날의 수국일 뿐이지만 기억을 더듬어 나간 끝에 마주친 진실은 잔혹합니다. (약간 호들갑을 떨자면) 가지와라 유리의 진실에 맞먹을 정도. 세쓰코의 이야기는 마지막답게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분위기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과거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라는 점이 그녀와 묘하게 어울리는군요.

사실, 이 정도의 이야기가 다 라면 굳이 두권 분량의 지면을 소비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흠...그러고 보니 출판사의 음모를 배제할 수는 없겠군요.) 이만큼의 분량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위에서 말한 내용들 사이사이에 온다 리쿠의 장기 혹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덕분이죠.

바꿔 말하면 온다 리쿠의 ‘이야기꾼’ 속성이 가득 담겨있다고 할까요. 고작 네 작품을 읽고 말한다는 게 그렇습니다만, 온다 리쿠의 작품을 읽다보면 문장이 화려하거나 특이한 것도 아니고, 어느 부분들은 소소한 내용들이 또박또박 이어질 뿐인데도, 아주 손쉽게 독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작가를 개인적으로는 ‘이야기꾼’이라고 부르는데, 온다 리쿠는 그런 면에서 탁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속성이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품을 읽고 나서 별로 필요 없는 내용을 줄줄이 써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읽는 중간에도 주제를 벗어나 방황하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취향에 맞지 않거나 단점이라고 의식하면서 보면 말입니다.

쥔장은 온다 리쿠의 단점 보다는 장점 쪽에 점수를 많이 주는 쪽입니다. 뭐랄까...씹는 맛이 좋은 글은 언제나 환영이니까요.


정리하자면...

손에 잡는데 시간은 제법 걸렸지만 읽기 시작하면서 꽤나 빠져들었던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얽혀있는 내용이 풍성했기 때문에 포만감이 제법인 작품. 네 사람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가 상당합니다. 온다 리쿠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추천할 만합니다.


덧.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를 읽은 분들은 가지와라 유리라는 인물을 기억하실 겁니다. 후기를 보면 ‘유리라는 인물이 바로 그 인물일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라고 하는데, 저도 비슷한 생각이 들더군요. 의도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마키오의 기억 속에 있는 유리는, 보리의 바다에서 봤던 유리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유리의 연극을 생각해보면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고. 뭐, 결국 어느 쪽도 정답은 아닐 겁니다. 삼월 시리즈의 접점인 듯 하면서 아닌 것도 같은... 조금 묘한 기분입니다.




거짓말쟁이 미 군과 고장 난 마짱 6권 by 유월

부제는 '거짓말의 가치는 진실'

매번 하는 말이지만 미 군과 마짱이 사는 마을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모 기업의 신약 실험장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비밀리에 약물을 투여받고 인성이 변해버린 건 아닐까 하는 망상까지 드는군요. 

쓸데없는 말은 접어두고, 미군마짱 6권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중간중간 미 군과 마짱의 이야기 - 수업 중이던 체육관에 괴한이 난입해서 총을 휘두르는 사건 - 가 끼어들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나가세(동생쪽), 코타, 안즈, 코이비, 카나에, 리카, 나츠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집니다. 이상하죠? 분명히 주인공은 미 군과 마짱이고 양을 보더라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훨씬 많은데도 별로 인상에 남질 않으니...

아마 이제는 주인공과 사건의 분위기에 익숙해진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익숙한 나머지 관심이 줄어들었다...정도. 여기에다가 지금까지는 주인공에게 가려져 있던, 주변 인물들에 대한 흥미도 한 몫을 했습니다. 

어쨌든 체육관에서 뒹굴고 있을 미 군과 마짱은 제쳐두고, 다른 사람들을 한번 봅시다. 

우선 나가세와 코타, 안즈의 이야기. 단편의 제목처럼 아동학대 피해자 2人이 과실치사 전과자 1人의 집으로 놀러가는 내용이죠. 이렇게 써 놓으니 참 아스트랄 해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슬픈 느낌이 납니다. 어린아이 셋이서 무너질 것 같은 정신줄을 붙잡고 나름대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고 있기가 좀 그렇군요. 이들을 한데 묶어놓는 존재가 미 군이라는 것도 껄끄럽기는 매한가지입니다.(오죽하면 미 군이냐...) 이런 이야기에 나가세의 너스레 - 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정서불안이라고 해야 할지 - 를 토핑처럼 얹어놓은 모습은 작가의 취향을 재확인 하는 선에서 패스. 복잡하게 생각하기가 싫어지는군요.

두 번째는 코이비 선생의 이야깁니다. 흠... 나름대로 잘 지내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 기쁘기가 한량 없습니다...는 아니잖아! 열심히 자고 먹고 떠드는데 세상만사 포기한 사람의 포스가 풀풀 풍깁니다. 제자리에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이 ‘이거야 말로 진정한 패배자’라는 느낌. 그런데도 여유가 있어 보이는 것은 집안이 빵빵한 탓 인거냐, 아니면 어른의 여유라는 것이냐. 뭐, 둘 다가 아닐까요. 겉으로는 여유가 있어도 바닥에 깔려 있는 정서는 무력감과 자포자기라서 그런지 읽다보면 한 없이 우울해집니다.

세 번째는 사랑에 빠진 여고생이자 검도부 부장인 카나에가 나옵니다. 생뚱맞긴 하지만 전혀 관계없는 인물은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시다. 무엇보다 여고생입니다! 게다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우후훗~ 이라고 기대를 하기 전에...이 작품은 ‘미군마짱’ 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놔~ 상큼발랄한 여고생의 사랑고민을 이런 식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데 절망해버렸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나에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 - 혹은 망상 -을 한 치도 빠짐없이 쫓아가는 통에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한마디로 머리가 아픕니다. 농담삼아 말했지만 기분 좋아질 수 있었을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놓는 것...정말 악취미에요.

네 번째는 리카와 나츠키 형사님의 이야기. 이 사람들...둘이 만나서 도대체 뭐하는 거냐? 만약 미 군이 둘 사이에 끼어 있었다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모습이군요. 단편들 중에서 가장 걸쭉하긴 합니다. 이리저이 꼬여서 머리와 꼬리가 어딘지 구분하기도 힘들어지는 대화 속에 휩쓸리다보면 정신머리가 빠져 나갈듯 합니다만, 그 와중에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정서는 (조금 과장한다면) 허무함이겠죠. 나츠키의 배려(?)가 조금 의외이긴 합니다. 그래도 선의 보다는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라는 느낌이라 큰 감흥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리카가 보여주는 유유자적함은 아무런 의지도, 방향도 없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부채질 할 뿐.


정리하자면...

이렇게 고약한 외전(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은 처음입니다. 슬프고 우울하고 멀미나고 허무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외전 따위는 싫엇! 



덧.
써놓고 보니 미 군과 마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질 않았군요. 뭐, 둘 다 알아서 살아 돌아오겠죠. 별 걱정 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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